서지마을 미사 순교자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함께 기억하며 미래를 열어가겠습니다.

성역화를 시작하며

서지마을에서 새롭게 순교자의 신앙과 삶을 만납니다.

우리 교구에서는 <서지마을>에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 신앙과 삶을 본받기 위한 작은 성지를 조성하기로 하였습니다. 서지마을은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있는데,
1839년 9월 6일 강원감영에서 순교하신 복자 최해성(요한)과 최비르지타, 그리고 많은 신앙 선조들이 살던 마을입니다.

우리 원주교구에서 ‘성지’ 혹은 ‘신앙유적지’라고 하면 박해시대의 깊은 신앙 역사를 담고 있는 배론성지와 풍수원성당, 박해가 끝나고 교우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 용소막성당을 먼저 떠올립니다.
이런 곳들이 우리 교구의 대표적인 성지, 신앙유적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곳들 외에도 우리 교구에는 역사 깊은 신앙유적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제천 백운의 화당리(꽃댕이)에도 박해시대에는 아주 큰 교우촌이 있었고 그 곳에 살던 많은 교우들이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셨습니다. 또 평창의 산너미(山楡)와 하일, 굴아위,
그리고 횡성의 정금과 영월의 주실 등에도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교우촌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에 성지를 조성하려고 하는 부론의 서지마을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교우촌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한 곳 한 곳 모두가 보물처럼 소중한 곳입니다. 모진 박해를 피해 집과 논과 밭을 버리고 명예와 이름을 내려놓고 심지어 이웃과 친척들을 뒤에 둔 채 신앙만을 품에 안고 산도 설고 물도
선 깊은 곳, 숨어들었던 자리입니다. 비록 생활은 곤궁했지만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더 깊게 만날 수 있었고, 함께 모인 교우들과 더불어 천국을 닮은 공동체를 이루었던 곳이 바로 그 교우촌입니다.
이런 교우촌 한 곳 한 곳이 씨앗이 되어 우리 신앙의 싹으로 자라났고 지금 우리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교우촌 모두를 성지로 개발할 필요는 없지만, 작은 비석이라도 세워
그 신앙을 기억하도록 하고, 그중 어떤 곳에는 작은 장소라도 마련하여 신앙 선조들의 신앙과 삶을 배우는 자리로 꾸미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성지로 조성하려고 하는 서지마을은 여러 교우촌 중에서도 제천 백운의 화당리(꽃댕이)와 더불어 꼽아서 기념할 만한 곳입니다. 벌써 오래전부터 서지마을에 적절한 장소를 마련하여 신앙선조들을 기리는
작은 기념비라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은 많았지만 여러 여건상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서지마을 출신의 두 분, 최해성(요한)과 최 비르지타가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면서 서지마을에 작은 성지를 조성하면 좋겠다는 목소리가 더 커졌습니다. 또 이미 다른 여러 교구에서는 서지마을로 성지순례를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서지마을에 교우촌이었음을 알리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순교자들에 대한 아무런 안내도 없어 아쉬웠다는 의견을 전해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서지마을에 살던 부론본당의 변 가브리엘라 자매님이 자신이 살던 집과 땅을 우리 교구에 기증하며 순교복자의 삶을 기리는 작은 성지로 조성해 주기를 청했고, 또 원주시와 강원도,
문체부 등에서도 이 곳 교우촌의 의미를 알고 동감하여 도움을 주기로 약속하여 오랫동안 바라던 서지마을 성역화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막 첫걸음을 떼는 서지마을 성역화는, 다른 무엇보다 그 곳에 살았던 신앙선조들의 신앙을 본받기 위한 것이고, 특히 순교 복자들이 품고 살았던, 하느님 앞에서의 온전한 비움과 헌신,
그 사랑을 배워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신앙선조들의 삶을 닮아 소박하게, 그리고 모든 것을 비우고 하느님 앞에 나간 복자들의 신앙을 배우는 비움의 성지로 조성될 것입니다.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욕심을 버리고 비움을 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성지로 조성 될 수 있도록 많은 교우분들의 관심과 기도 부탁 드립니다.

“원주고을을 다 준다해도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첫 삽도 뜨지 않은 서지마을, 풀이 무성한 서지마을을 두고, 운영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은 그야말로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의 뜻이, 별똥별이 소원을 이루어 주어서가 아니라, 그 짧은 순간에도 당장 떠올리는, 늘 마음에 품고 있던 간절함 때문이라면,
서지마을의 성역화를 시작하며, 미리부터, 어떤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품고, 그 간절함을 미리 품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도 성급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서지마을을 두고 갖는 첫 기대는 무엇보다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작은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구에는 성지와 신앙유적지가 많지만, 서지마을은 그중에서 유일하게 우리 교구에서 순교하신
’원주교구 순교자‘와 관련된 마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서지마을과 관련된 분은 1839년에 순교하신 최해성(요한) 복자와 최비르지타 복자이지만 그 두 분이 순교한 이후에도 남은 신자들은 서지마을에서
신앙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서지마을에 살던 박 사도요한의 아내인 ‘최 필로메나’와 ‘조치언’ 같은 분들이 순교 하셨습니다. 또 1898년, 원주본당(현 원동성당)의 리굴로(Rigoulot) 신부님의
편지에는 서지마을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교리교사가 신앙 때문에 고초를 당한 일이 적혀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1800년대 말까지는 교우촌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지마을은 무엇보다 이런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의 신앙과 삶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비움’을 배우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순교자와 신앙선조들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비움’일 것입니다. 그분들은 비우고 또 비우고 또 비웠습니다.
우선은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는 물질적 비움을 선택했고, 명예를 버리는 사회적 비움을 선택하였으며, 마침내 자신을 비우는 신앙적 비움, 영적 비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런 비움의 모습은 ‘채움’을 향해 걸어가는 오늘의 우리들을 크게 깨우쳐 줍니다. 무엇이든, 세상을 통해서도, 타인을 통해서도, 가족을 통해서도, 자녀를 통해서도, 심지어 신앙을 통해서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더 채우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그 채우려는 마음과 욕심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갈등과 상처를 입습니까? 복음의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16, 25)라는 말씀은 추상적인 말씀이 아니라 실제 우리 일상생활에서 반복하고 살아가야 할 ’비움‘을 재촉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 ’비움‘을 서지마을을 통해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는 ‘화해’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서지마을에서 순교자들의 삶을 돌아보고 채우려고 치닿던 우리 자신을 내려놓으면, 아마도 새로운 눈으로 자연과 사물, 세상과 사람이 보이고,
갈등을 빚었던 가족과 이웃도 떠오를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안에서 살고자 했던 내가 얼마나 다른 길로 와서, 엉뚱한 것을 채우려고 바둥대며 살아왔는지도, 문득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용서로 나아가는 지혜와 화해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지마을이 순교자와 신앙 선조들의 전구와 하느님의 이끄심을 통해 진정한 ’화해‘를 체험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서지마을은, 온전한 ‘평화’를 누리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평화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 27)라는 말씀처럼, 이제껏 세상에서 얻고 구하려고 했던 평화가 아닌,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이 이미 이 서지마을에서 누렸던 평화를 다시 한번 누리고 체험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지마을이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주님을 만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신자분들의 많은 관심과 기도, 도움을 간절히 청합니다.

서지마을은 이렇게 운영되면 좋겠습니다.
- 최해성(요한) 복자의 말씀

아직 첫 삽도 뜨지 않은 서지마을, 풀이 무성한 서지마을을 두고, 운영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은 그야말로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의 뜻이, 별똥별이 소원을 이루어 주어서가 아니라, 그 짧은 순간에도 당장 떠올리는, 늘 마음에 품고 있던 간절함 때문이라면,
서지마을의 성역화를 시작하며, 미리부터, 어떤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품고, 그 간절함을 미리 품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도 성급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작은 공간

서지마을을 두고 갖는 첫 기대는 무엇보다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작은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구에는 성지와 신앙유적지가 많지만, 서지마을은 그중에서 유일하게
우리 교구에서 순교하신 ’원주교구 순교자‘와 관련된 마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서지마을과 관련된 분은 1839년에 순교하신 최해성(요한) 복자와 최비르지타 복자이지만
그 두 분이 순교한 이후에도 남은 신자들은 서지마을에서 신앙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서지마을에 살던 박 사도요한의 아내인 ‘최 필로메나’와 ‘조치언’ 같은 분들이
순교 하셨습니다. 또 1898년, 원주본당(현 원동성당)의 리굴로(Rigoulot) 신부님의 편지에는 서지마을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교리교사가 신앙 때문에 고초를 당한 일이 적혀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1800년대 말까지는 교우촌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지마을은 무엇보다 이런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의 신앙과 삶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움’을 배우는 공간

두 번째는 ‘비움’을 배우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순교자와 신앙선조들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비움’일 것입니다. 그분들은 비우고 또 비우고 또 비웠습니다.
우선은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는 물질적 비움을 선택했고, 명예를 버리는 사회적 비움을 선택하였으며, 마침내 자신을 비우는 신앙적 비움, 영적 비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런 비움의 모습은 ‘채움’을 향해 걸어가는 오늘의 우리들을 크게 깨우쳐 줍니다. 무엇이든, 세상을 통해서도, 타인을 통해서도, 가족을 통해서도, 자녀를 통해서도, 심지어 신앙을 통해서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더 채우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그 채우려는 마음과 욕심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갈등과 상처를 입습니까? 복음의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16, 25)라는 말씀은 추상적인 말씀이 아니라 실제 우리 일상생활에서 반복하고 살아가야 할 ’비움‘을 재촉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 ’비움‘을 서지마을을 통해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화해’가 이루어지는 공간

세 번째는 ‘화해’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서지마을에서 순교자들의 삶을 돌아보고 채우려고 치닿던 우리 자신을 내려놓으면, 아마도 새로운 눈으로 자연과 사물, 세상과 사람이 보이고,
갈등을 빚었던 가족과 이웃도 떠오를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안에서 살고자 했던 내가 얼마나 다른 길로 와서, 엉뚱한 것을 채우려고 바둥대며 살아왔는지도, 문득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용서로 나아가는 지혜와 화해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지마을이 순교자와 신앙 선조들의 전구와 하느님의 이끄심을 통해 진정한 ’화해‘를 체험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서지마을이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주님을 만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신자분들의 많은 관심과 기도, 도움을 간절히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