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마을 소개 순교자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함께 기억하며 미래를 열어가겠습니다.

원주교구 순교자

성인 정하상(바오로), 유선임(체칠리아), 이문우(요한), 남종삼(요한), 장주기(요셉)

복자 김강이(시몬), 박경화(바오로), 최해성(요한), 최 비르짓다

하느님의 종 김범우(토마스), 황사영(알렉시오), 이유일(안토니오), 심능석(스테파노), 유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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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덕소(德紹), 호는 비원(斐園)이다. 황석범과 이윤혜의 유복자로 서울 아현에서 태어났고, 조부와 부친이 일찍 돌아가신 탓에 어머니와 증조부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79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그해 정약현의 큰 딸 정명련(丁命連)과 혼인하였으며, 처삼촌들과 처고모부 이승훈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교우들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91년 박해 때에 친척과 친구들이 교회를 멀리했지만, “천주 신앙은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으로 확신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널리 교류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입교시켰고, 신심 서적을 필사하거나 교우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명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집을 명도회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게 하였고, 신부를 도와 교회에 봉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801년 박해에 2월 10일(음)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는 자신의 성을 이(李)로 바꾸고 상복으로 변장한 후, 김한빈(베드로)과 함께 배론에 있는 김귀동의 집으로 가서 토굴에 은거하였다.

    3월 그믐에 김한빈을 서울로 보내 교회 소식을 알아 오게 하였고, 그로부터 지도층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의 자수 소식을 전해 들었다. 8월 26일(음) 찾아온 황심에게서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었고, 그에게 백서(帛書) 초안을 보여 주면서 북경에 전달할 방법을 의논하였다. 9월 22일(음) 백서를 완성하였고, 황심을 통해 옥천희(요한)에게 전달하고, 옥천희가 북경에

    전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9월 15일(음) 황심이 체포되었고, 황심의 고발로 9월 29일 김한빈과 함께 체포되고 백서 또한 압수되었다. 의금부로 압송된 그는 10월 9일부터 신문을 받았다.

    그는 “천주교는 올바르며, 나라와 백성에 해가 되지 않는 종교입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고, “백서를 작성한 목적은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데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백서를 흉서로, 그를 반역자로 지목하고, 그 안에 담긴 교회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추궁하였다. 그 결과 11월 5일(양 12월 10일)

    대역부도(大逆不道)의 판결, 즉 나라에 큰 죄를 지어 도리에 어긋났다는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형으로 순교하였다.  

     

    『순조실록』에 “죄인 황사영은 본래 정약종의 질서(姪婿)로 사술(邪術)에 미혹되어 빠져 들어가 주문모가 나온 뒤에 스승으로 섬기고 아비라고 불렀으며, 영세를 받고 명호(名號)를 받았었다.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기미를 알고 망명하여 산협에 숨어서 불궤(不軌)를 도모하였으며, 황심·옥천희와 함께 난만하게 화응(和應)하여 백서를 써서 내어 장차 서양인의 천주당에

    전하려 하였는데, 백서 가운데에 말한 것은 글자마다 흉악한 뱃심이었고 글귀마다 역적의 심장이었으므로, 위를 향하여 부도(不道)한 말을 한 것과 국가와 더불어 원수가 되려는

    계획을 한 것 아님이 없었기에 대역 부도(大逆不道)한 죄로써 결안하였다.”고 하였다(『순조실록』 권3, 순조원년(1801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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